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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의 본질: 절망(despair)이라는 실존적 병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표면적으로는 죽음을 말하지만, 실상은 '살아 있음에도 죽은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 병의 이름을 ‘절망’이라 명명하며, 절망은 인간 존재의 구조적 문제라고 본다. 절망은 단순한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실존적 병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자기(Self)’로 규정하며, 자기는 '자신과의 관계'이자 '그 관계와의 관계'라고 표현한다. 이 복잡한 정의는, 인간이 단순히 물리적 실체나 감정의 주체가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구성하는 존재임을 뜻한다. 이때, 자기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거나 상실될 때, 인간은 절망 상태에 빠진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상태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규정하며,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로 바라본다.
실존(existence)을 향한 투쟁: 절망의 세 가지 유형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첫 번째는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절망', 즉 무지에서 오는 절망이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흔한 절망의 형태로,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상태이다. 직장, 돈, 인간관계 등 외부 조건에 몰두하며 '진짜 자기 자신'을 직면하지 못하는 삶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절망'이다. 이 유형의 사람은 자신의 본질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거부하거나 외면하려 한다. 이는 자기에 대한 회피이며, 외부에서 정의된 성공이나 사회적 기준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는 이들이 자주 겪는 형태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만, 될 수 없다는 절망'이다. 이는 가장 심각한 형태로, 자기 자신이 되려는 열망은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오는 절망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세 가지 유형 모두가 '자기와의 불화'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해방은 '신 앞에서의 자기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고 제시한다.
신(God)과의 관계: 치유의 길로 향하는 절망의 역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한 자기 수용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신 앞에 설 수 있는 용기”라고 말한다. 여기서 '신'은 기독교적 절대자이자, 존재의 근원이자,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 자기를 상징한다. 신 앞에 선다는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이 아닌 존재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행위다.
이러한 사유는 단순한 종교적 귀의가 아니라, 철학적 자기 초월의 방식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신은 자기 초월의 거울이자 인간 존재의 궁극적 기준이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갇힌 존재이며, 그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망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절망은 신과의 관계를 통해 해소될 수 있다. 절망은 괴로움이지만 동시에 구원의 출발점이다. 즉, 절망은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자기실현을 위한 필수적 고통이며, 존재의 진실에 이르게 하는 철학적 통로인 것이다.
자기(self)의 회복: 절망을 넘어서 실존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의 철학은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데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존재가 ‘자기 자신이 되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단순히 자기 계발의 수사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 ‘되어야 할 자기’를 향해 나아가지 않을 때, 그 상태 자체가 죽음이라 보았다.
이 책은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상실하며, 다시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치밀하게 분석한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외부의 성공, 비교, 소비, 경쟁을 통해 인간을 정의하려 든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그런 외적 지표가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만 진정한 자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절망은 자기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부족할 때 찾아오는 실존적 경고이며, 철학적 치유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죽음(death)의 철학적 의미: 살아 있음의 재정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제목은 매우 역설적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단지 죽음을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살아 있음'이 실제로는 죽음보다 더 심각한 절망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가 자기를 모르고 살아가는 상태, 타인의 시선 속에 사는 상태, 끊임없는 외적 욕망에 지배당하는 상태는 실존적으로 '죽은 삶'이다.
그는 진정한 죽음이란 숨이 멎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죽음을 통해 삶을 다시 묻는 철학적 성찰을 제안하며, 삶의 질과 방향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삶은 명료해진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진정한 인식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철학적 자산이 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던지는 실존적 메시지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단순한 철학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존재론적 지침서이자, 현대인의 불안과 혼란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서이다. 절망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회복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며, 죽음은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한 거울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살아 있는가?" "당신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키에르케고르의 메시지는 냉정하지만 따뜻하다. 그는 말한다. 진정한 삶은 죽음을 넘어선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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