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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 5. 6.

    by. jin-75

    목차

      지속(durée)의 철학: 베르그송 시간 개념의 혁신

      앙리 베르그송은 20세기 초 프랑스 철학의 핵심 인물로, 고전적 형이상학과 과학적 시간 개념에 도전하는 독창적인 ‘지속(durée)’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시간을 단순히 물리적 측정 단위로 보지 않고, 인간 의식 속에서 경험되는 내면적 흐름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지속’은 균질화되고 수량화되는 뉴턴식 시간과 구별되며, 각각의 순간들이 서로 겹치고 이어지며 축적되는 질적 시간이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의식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기억을 매개로 지속적으로 연결된다. 이 흐름은 단순한 연속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와 내적인 긴장을 수반하는 창조적 과정이다. 그는 이를 통해 물리적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생명의 본질적 운동과 그 특유의 창조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관점은 죽음을 단순히 생명의 종결점이 아니라, 지속의 중단 혹은 전이로 이해하는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러한 시간 개념은 인간 존재를 단순히 현재에 갇힌 실체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존재로 조망하게 하며, ‘죽음’이라는 사건 또한 고정된 단절이 아니라 존재의 리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시간적 현상으로 전환시킨다.

      죽음의 시간성: 물리적 종결인가, 의식의 변형인가?

      베르그송의 지속 철학에서 죽음은 시간의 끝이 아니라 시간의 질적 전환이다. 그는 죽음을 단순히 생물학적 정지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은 인간 의식이 경험하는 ‘지속’이라는 시간의 흐름에서, 의식의 접힘(folding)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베르그송에게 있어 삶이란 물질과 기억, 본능과 직관이 뒤엉킨 복잡한 흐름이며, 죽음은 그 흐름이 하나의 형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사건이다.

      죽음은 외적인 시계 시간에서는 끝을 의미하지만, 의식 안에서는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없는 전환이다. 베르그송은 이와 같은 '죽음을 의식하는 시간'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살아 있는 자의 관점에서만 구성되는 개념이라고 본다. 죽는다는 것은 사실상 주체 자신에게는 의식의 부재이며, 따라서 죽음을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데리다나 하이데거처럼 죽음을 존재론적 사건으로 다루는 철학자들과는 다른 관점이다. 베르그송은 죽음이 의식의 끝이 아니라, 의식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지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며, 그것을 철학적으로 시간성의 파열이 아닌 시간의 잠재적 환원으로 간주한다. 죽음은 그저 '지속의 탈락'이 아니라, 의식적 시간성의 끝자락에서 일어나는 질적 변화다.

      생명의 창조성과 죽음: 직관과 시간의 해방

      베르그송 철학의 중심에는 생명의 창조성(élan vital)이 있다. 그는 모든 생명체가 고정된 틀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창조적 진화를 통해 변화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명은 시간과 함께 탄생하고, 시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생명은 본질적으로 ‘지속하는 것’이며, 죽음조차도 그 지속의 내적 논리 속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죽음은 이 창조적 흐름의 종결이 아니라, 하나의 전환이며, 지속의 다른 양상이다. 베르그송은 ‘직관(intuition)’을 통해 이러한 지속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다고 본다. 직관은 논리적 사고나 과학적 분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포착하는 능력으로, 시간의 질적 감각과 생명의 리듬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이 직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단지 끊김이나 상실이 아니라, 생명 전체의 리듬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자연스러운 이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단지 철학적인 사유에 머물지 않는다. 죽음을 직관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자만이 삶을 더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숨겨진 메시지다. 죽음은 생명의 반대편이 아니라, 지속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또 다른 방식의 존재 방식이며, 이는 단지 사라짐이 아니라 의미의 정지다. 이러한 철학은 죽음을 부정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존재의 시간적 감각 안에서 죽음을 이해하려는 사유의 깊이를 제공한다.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과 죽음의 시간성

      기억, 의식, 그리고 죽음 이후의 가능성

      베르그송 철학에서 기억은 시간의 연장이자, 지속의 핵심 매개체이다. 그는 인간의 기억을 단순한 정보 저장소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지속의 영속적 흔적으로 간주했다. 이때 죽음은 육체의 기능 정지이지만, 그동안 축적된 기억과 의식의 흐름은 단절되지 않는다. 이는 초월적이거나 종교적인 사후세계 개념과는 다른, 철학적·심리적 차원의 ‘지속의 여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죽음을 맞이한 자의 기억은 타인의 의식 속에서, 혹은 사회적 기억 속에서 다시금 지속된다. 이 개념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이차적 시간성’의 일면이다. 죽은 자의 기억은 더 이상 그의 의식 속에서는 지속되지 않지만, 남은 자들의 기억과 언어 속에서 재지 속(re-durée)된다. 이는 죽음을 단절이 아닌 관계적 시간의 변형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러한 철학은 현대의 죽음 이해 예컨대 디지털 공간에서의 영속성, 온라인 추모 공간, SNS에 남은 기록들과도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은 그 자체로 기억의 시간성을 재정의하며,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의식과 삶의 흔적이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 속에서 계속 반향 될 수 있다는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이 말하는 죽음의 새로운 의미

      앙리 베르그송은 전통적인 시간 개념과 생사관을 해체하고, 삶과 죽음을 하나의 연속된 ‘지속’ 속에 재배치한다. 그의 철학에서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존재의 리듬 속에서 자연스럽게 도래하는 시간의 한 양상이며, 그것은 생의 마무리이자 해방, 나아가 새로운 의미 구성의 가능성으로 열린다.

      죽음을 단지 공포나 비극으로만 보지 않고, 시간과 의식의 흐름 속에서 질적 변형의 순간으로 받아들이는 베르그송의 철학은, 오늘날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사유하고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생명은 멈추지만, 지속은 기억과 의식 속에서 유령처럼 살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철학은 죽음을 넘어 삶을 다시 사유할 수 있게 한다.